태양 없이

"당대의 시간은
늘 그 자리에만 있으리니..."

T.S.엘리엇,"재의 수요일"

"먼 곳의 시간을
가까이 일치 시킨다"

라신,"바자제" 2판 서문

그가 말해 준 첫 이미지는
1965년 아이슬랜드 길가의 세 아이의 모습이었다

그것이
행복의 이미지였다면서

여러 번 다른 이미지와 연결시키려해도
잘 안됐다고 했다

편지에 쓰기를
언젠가는 그 장면을 긴 공백이 있는

영화의 도입부로
삼을텐데

행복을 감지 못한 사람은
그 공백만을 보리라 했다

태양 없이

그의 편지
...북쪽 섬 홋카이도에서 돌아가는 길이야

돈 있거나 급한 이들은 비행기 편이고
나머지는 페리호에 탄 채

꼼짝않고 있으면서
한잠씩 자

묘하게 과거나 미래의
전쟁이 연상돼

밤열차,공습,방사능 낙진 같은
전쟁 속의 일상의 편린들이

그는 시간이 유예된
취약한 순간들을 좋아했다

그 순간의 기억들은
추억으로만 작동할 뿐이다

편지:세계 곳곳을 다녔더니
이젠 시시한 일에 마음이 끌려

이번 여행에선 집요한
현상금 사냥꾼처럼 거기 매달렸어

새벽이면
토쿄에 있을 거야

아프리카에서 보낸
편지들도 있다

거기선 아프리카와 유럽
아시아의 시간들을 비교했다

19세기에 인류가
공간 개념을 받아들였고

20세기에는 다른 시간대가 공존한다는
의구심을 품게 됐다고 했다

...아무튼 일 드 프랑스에
에뮤가 있다는 거 알아?

비자고 제도에서는
처녀들이 제 짝을 고른다고 썼다

또 토쿄 근교에는 고양이에게
봉헌된 절이 있다고 했다

...이 마음 씀씀이를
전해주고 싶어

한 순박한 부부가 이곳에서
자기네 고양이 토라를 위한

위패를 세우고 있었어

아니,죽은 건 아니고
없어진 거야

그래도 어느 날 죽게 되면
누가 명복을 빌어주고

제 이름대로
격식을 차려주겠냐는 거야

그래서 비를 무릅쓰고
여기 와서

제를 올려 틑어진 시간의
망을 수선하는 거야

편지:평생 기억이 어떻게 작용하는 지
숙고하게 될 거야

망각의 반대어라기보다는
그 안팎으로써

역사를 재기록 하듯
기억을 재구성 하지는 않잖아

목마름을
어떻게 기억하겠어?

그는 가난에 대한
언급을 꺼려했다

그러나 편지 속에는 일본식 낙오자들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도처에 부랑인,룸펜
소외계층과 조선인들이 있어

마약 살 돈도 없어서
맥주나 신 우유 한잔에 취하지

오늘 아침 도시의 복판인
나미다바시에서 20분 동안

한 사내가 사회에 복수하려는 듯
엉터리 교통정리를 하더군

이들에게 사치란 성묘날
사케를 무덤에 붓는 정도지

나미다바시의 작은 주점에서
내가 한잔씩 돌렸어

이곳이 서로가 동등해지는
그런 장소야

이 안에서는 모두들
푸근하게 대하더군

그는 케이프 베르데 제도의
포고 선창 이야기도 했다

...얼마나 기다려야 이 옹기종기
모인 이들이 배에 오를 수 있을까?

방랑하며 표류하는
정처없는 사람들

포르투갈이 조차지로 삼은
이 척박한 땅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이야

빈털털이로
공허하게 늘어선 이들

촬영 한답시고 카메라를 보지 말라고
하는 게 솔직히 우스워졌어

또 다른 편지
...사헬의 풍경은 이미 늦어버린

난파선에 물 차오르는 듯한
가뭄의 표식이야

비사우의 카니발에서
환생한 동물들의 모습은

곧 초원이 사막으로 변하리라는
두려움의 전조야

부국에서는 잊혀진 생존 양상이지만
일본만은 예외지

뻔질나게 오가며 대조점을 찾는 건 아니야
생존의 양 극단으로의 여행이지

그는
세이 쇼나곤 이야기를 했다

11세기 초 헤이안 시대
사다코 왕비의 시녀라고 했다

...역사는 실제로
어디서 이루어졌을까?

지배자들은 복잡한
정략 싸움에 골몰했어

실세 가문이 대대로
섭정을 했고

궁중은 음모와 지략이 판치는
곳이었을 뿐이었어

그러나 몇몇 한가한 이들이
소소한 명상으로 허허로움을 습득하여

떵떵거리는 권세가들보다
일본인의 정서에 이바지 했지

쇼나곤에게는 목록이 있었어
'우아하거나','성가시거나','무가치한' 일들까지

그러다가 '가슴 뛰는 일들'도
그 속에 넣었지

촬영하다 보니
쓸만한 기준이었어

일본의 경제기적은 높이 사지만
진짜 볼만한 건 마을 축제야

편지:지바 해안에서 돌아오면서
쇼나곤의 목록을 생각했어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뛰는
그런 징후들

빛나지 않으면 태양답지 않고
청명하지 않으면 봄 같지 않아

가격표 붙이듯 미사여구의 남발은
어줍짢은 짓이야

일본 시가는
수식어가 없어

배와 바위,안개,개구리,우박
백로,국화를 열거하는 걸로 족해

최근 신문에 나고야의
한 남자 이야기가 실렸어

작년에 연인을 잃고 일본식으로
미친듯 일에 몰두했대

전자 부문에서
중요한 성과도 이뤘지

5월이 되어 자살했어

봄이라는 말을
못 견뎠다고 해

토쿄 이야기로 되돌아갔다

그는 휴가길에 동행했던 고양이가
금새 근처를 살피려는 듯이

쪼르르 달려나가
다 그대로인지 기웃거렸다

긴자의 부엉이,심바시의 기관차
미츠코시 백화점 앞의 여우 사원...

거기서 록가수와
소녀들과 마주쳤다

소녀들이 인기를 좌지우지 하기에
제작자들이 쩔쩔맨다고 했다

얼굴에 흉터 난 여자가
행인들 앞에서 가면을 벗고

예쁘다고 하지 않으면
할퀴려는 모습도 봤다

모든 게 흥미로웠다

다저스의 성적이라던가
경마 복승식은 상관도 않던 그가

지요노후지의 지난 스모 경기를
들고 나왔다

또한 황실과 왕세자의 근황

TV의 아동프로에 고정 출연하는
전직 폭력배도 관심거리였다

고국의 가족들에게서도 맛보지 보했던
소박한 즐거움을

천이백만의 익명의 시민들이
그에게 제공했다

편지:토쿄는 전철 교차로와
전선이 혈맥처럼 뻗어나간 도시야

TV가 문맹의 주범이라고 하는데
여기선 거리에서 다들 책을 읽어

이 황인종들이 거리에서만 읽거나
그냥 읽는 척 하는 건 아니겠지

신주쿠의 대형서점
키노쿠니야에서 약속을 했어

그래픽의 천재들이 일본식
시네마스코프를 고안해냈어

10세기 이전의 비운의 만화
여주인공들이 각광을 받아

무정한 작가들이나
검열에 시달리면서도 말이야

그림에서 빠져나와
벽을 누비기도 해

만화의 도시라
할만하지

만화의 행성

어느 모로나 스탈린의 바로크 식
모사 같은 소상도 눈에 띄어

대형 간판 속 인물이
만화 독자들을 내려다 보고

대형 초상화들끼리
서로 훔쳐봐

해질녘이면 대도시는
동네로 분산되지

은행 건물 사이로
지역 묘지와 전철역,신사가 자리해

토쿄 곳곳에 깔끔하고 소박한
옛 촌락들이 다시 들어서는 모습이야

그는 신주쿠의 작은 주점에서
어딘지 귀에 익은 인디언 플루트 연주를 들었다

고다르의 영화였는지 세익스피어의 무대였는지
가물가물 했다고 했다

그 뒤 니시니포리의 식당에서
식사를 했는데

거기서 야마다씨가 실전요리의
진수를 선보였다고 했다

그리고 재료를 섞는 야마다씨의
손놀림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회화나 철학,카라테의 어떤 기본 개념을
연상했다고 썼다

또 야마다씨가 겸손하게 자기 방식을
발휘하는 실력자며

이로써 토쿄의 첫날에 안성맞춤의
방점을 찍었다고 했다

...기억의 궤인 TV 앞에서
하루를 보냈어

나라에서 본
성스러운 사슴

멋모르고 찍은 게 15세기
바쇼의 시의 한 장면이야

"버드나무 사이로
펄럭이는 백로여"

광고가 하이쿠처럼
눈에 들어왔어

서구는 잔학취미인데
또 못 알아듣는 즐거움까지 곁들여졌지

환청이었나 싶게
일본어가 귀에 들어왔어...

알고보니 제라드 네르발에 관한
NHK의 교양프로였어

8시40분
캄보디아

장 자크 루소에서 크메르 루즈까지
우연인가,역사 감각인가?

"지옥의 묵시록"에서 브란도의
확고하고 묵직한 한 마디...

"공포에는 얼굴과 이름이 있다...
공포를 친구로 삼아야 한다"

얼굴과 이름 있는 공포를 떨치려면
다른 이름과 얼굴을 선보여야지

일본 공포영화는 죽은 미녀를
정교하게 등장시켜

지나친 잔혹함에
질리기도 하지만

고통에 익숙한 아시아인들의 심성이
엿보이고 비장미가 있어

보상이 뒤따르지
귀신 퇴치 후의 나츠메 마사코 등장

절대미에도
이름과 얼굴이 있어

그런데 일본 TV를 보고 있을수록
그 속에서 시선이 느껴져

현장보도 방송에서 조차
눈이 마력적인 중심 역활을 해

선거의 승자는 달마상의 눈에
일획을 가하지

패자는 침통하지만 근엄하게
외눈박이 달마상을 들고 물러가

유럽의 영상물들은
이해 곤란이야

후시녹음된
화면을 봤는데

한참 뒤에 보니
폴란드야

여태 다행히
지진 지역엔 없었는데

간 밤의 지진으로
크게 깨달은 바 있어

시는 불안 속에 태어나
방랑하는 유대인들,흔들리는 일본인들

언제든 모든 게 뒤집어지는데
만사가 가소롭지

일상의 세계가 깨어지고,흩어져
원천무효가 되는 곳이야

그래서 기차로 행성을 날고
사무라이들은 불변의 쟁투를 벌이지

사물의 일시성이랄까

다 봤어

심야의 성인쇼까지

신문만화에서 그렇듯이
부호화 된 가식이 있어

검열이 자르는 게 아냐
쇼여서지

부호를 전달해

요는 절대
가려야 한다는 거야

종교가 늘상 하는 짓이지

그해 토쿄 거리의 군상 중에
새 얼굴이 등장했어,교황

소고 백화점 7층에서
바티칸에서 처음 외출한 비장품 전시회

그의 편지

산업스파이처럼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길들

아마 한 2년 뒤면 좀 더 효율적인
가톨릭의 대중판이 등장하지 않을까

뭐 다른 성물들에게도
매혹적인 요소가 공존해

일본의 성물들도 메이시 백화점에서
전시하게 될까?

홋카이도의 조센카이에서
그런 걸 봤어

박물관과 성소,섹스용품점을 합쳐놓은 듯한
모습에 웃음부터 나왔지

감탄스럽게도 일본인들은
이런 식으로 경계를 지워

같은 맥락에서 조각상 감상과
공기인형 구입이 이뤄지고

여성의 다산성 앞에
동전이 수북히 쌓이지

TV의 책략이 안 통하는
노골적인 전시품들이야

성기 노출이 꼭
상업적 용도만은 아니잖아

타락 이전의
세상이 이랬겠지

청교도주의의 합병증이야
미국식 위선의 그늘이 드리워졌지

봉헌된 분수 앞에서
사람들이 웃고 있고

한 여성이 가만히 상징물을 쓰다듬어
우주와 교감하듯

박물관의 다른 구역은 동물들 차지야
꿈의 지상낙원의 재현인가

모르겠어...

검열을 우회해서
동물을 내세웠을 진 몰라도

순수한 조화는 불가능함을
반영하지

원죄가 아니어도
실락원이 됐을 세상이야

조센카이의 순한 동물들의 후광 속에서
일본 사회의 근본 균열을 읽었어

남성성과 여성성의
균열

일상에서 두가지 양태로
표출돼

무도한 살육행위나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세이 쇼나곤의 차분한 비애

기독교의 침투 앞에서
인성이 수성으로 격하되면서

그 수성에 신랄하게
대처하게 됐어

그 비애의 빛깔을 사무라 코이치는
이렇게 읊었어

"누가 시간이 상처를
온전히 치유한다 했나?

시간은 상처 아닌
다른 것들을 치유할 뿐

시간과 함께
상처의 골은 한없이 패이고

시간과 함께
육체는 이내 사라지리

이미 육체는 가고 없어도

떨어져나간
상처는 남으리"

그는 일본의 비밀이
레비 스트로스의 '사물의 슬픔' 같은거라 했다

그건 잠시 사물과 일체화 되는
교감 의식으로 대변된다

인간이나 사물이 다 그 과정 속에 있는
부패와 불멸성

그의 편지

물신숭배가 흔한 아프리카에 비하면
일본은 약과지

그런데 보이지 않는 만물이 다 동격이라는
이 널리 퍼진 믿음은 뭘까?

공장이나 고층건물을 지을 때
그곳 지신에게 고사부터 지내거든

붓이나 주판
녹슨 바늘까지 그 대상이야

그 중 하나가 9월 25일의
망가진 인형의 혼을 달래는 의식이지

자비의 관음상을 모신 키요미츠사에
인형들을 쌓아놓고 태우는 거야

의식을 참관했는데

표정들이 가미가제 조종사들을
떠나보내는 사람들 같았어

기니비사우의 사진을 보낸 편지에서는
케이프 베르데의 음악을 동봉한다고 했다

아밀카르 카브랄의 독립의 꿈을
기리면서

...왜 이 소국이 그 빈곤함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아야만 할까?

포루투갈을 내쫓고
자주해방을 이룬 사람들인데

포루투갈 군은 참패를 당해
독재정권 타도 운동이 일어났고

유럽 혁명사에
한 획을 긋기도 했지

누가 기억이라도 할까?

역사의 창에서
내던져진 빈 병처럼

아침에 피지구티 부두에 갔어

1959년 모든 것이 시작된 곳이고
투쟁의 첫 희생자를 배출했지

자욱한 안개 속에서
아프리카인들의 심중은 오리무중이야

이 느릿느릿한 열대의 부두노동자들이
과연 투쟁을 했던 것일까

독립을 이룬 날 아침
제3세계 지도자들은 다 이런다지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야"

카브랄은 그럴 틈도 없이
먼저 암살 당했지

어쨌든 문제는 시작 됐고
지금껏 계속되고 있어

혁명의 낭만에 비하면
성가신 문제들

일과 생산,분배,힘 딸리는 전후복구
권력과 특혜의 유혹

뭐 단물 대신
쓴 맛을 안겨주는 게 역사니까

내 관심사는 딴 데 있었어
어떻게 비사우 여자들을 찍을까?

분명히 마법의 눈에
반감을 표시했어

겨우 비사우의 케이프 베르데 시장에서
마주 보는 인간 취급을 받았어

수작을 걸듯
탐색이 진행 됐어

여자를 봤어

쳐다 보더군

카메라를 의식 했어

눈길을 깔았지만 무심결에도
찍힐 각도를 유지했고

결국 생생하게

정면을 응시했어

초당 24프레임으로
지속 됐어

여자들의 천성에는
없애버릴 수 없는 게 있어

남자들한테는 좀 뒤늦게
나타나는 현상이지

아프리카 남자들도
훌륭하지만

아프리카 여자들을 근접촬영하면서
남자들 기대는 접었어

이번엔 하치코라는
개 이야기다

매일 역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개였어

주인이 죽었는데 개는 모르고
끝까지 기다리는 일을 계속했어

사람들이 감동해
먹을 걸 갖다줬지

죽은 뒤 개의 기념상이 세워지고
늘 그 앞엔 초밥과 떡이 놓여져 있어

충견 하치코의 혼은
배고픈 일이 없을 거야

토쿄 곳곳에 이런 미담과
관련 동물들이 있어

미츠코시 백화점 앞의 사자상은
프랑스 회화 수집가 오까다씨 소유로

백화점 100주년 기념으로
베르사유궁을 빌렸던 인물이지

컴퓨터 매장에서는 일본 젊은이들이
아테네의 팔라이스트라에서처럼 두뇌를 연마 중이었어

필승 전략으로

미래의 역사책은 이런 집적회로의 전쟁을
살라미스 해전과 동급 취급할지도 몰라

아무튼 불운한 상대를
기리는 장소도 있어

신사복 매장에서는
존.F.케네디를 이번 시즌에 내세웠어

거북이 이름을 딴 역사 한 구석에는
일본 애국당 총재

아카오씨가
매일 나와

이동연단에서 국제공산주의의
음모를 일갈한다고 했다

편지

극우파 차량의 깃발과 확성기는
토쿄의 풍경의 일부야

아카오씨는
그 핵심인사지

하치코처럼 동상도
세워줄 걸

전쟁의 전도사로써
전선으로 떠나면 말이야

60년대에
나리타에 있었어

그곳 농민들의
공항건설 반대투쟁이 있었는데

그 배후에 소련이 있다고
아카오씨가 비난했어

토쿄의 정치 명소는
유라쿠쵸야

전에 승려들의
베트남 평화 법회도 있었어

오늘은 러시아의 북방열도 병합에 항의하는
우익청년단체의 시위가 있었어

그 가증스런 북방의 점령자가
실리 면에서는

늘 경제침략 운운하는 우방 미국보다
훨씬 낫다는 사람도 있어

참,간단한 게 없네

길 다른 쪽은
좌파가 차지했어

73년 토쿄에서 남한 비밀경찰에 납치됐던
천주교인 야당 지도자 김대중씨가

사형선고를 받았어

한 그룹이
단식농성을 시작했어

아주 년소한 투사들이
지지서명을 받고 있어

투쟁 희생자의 1주기를 맞아
나리타로 돌아갔어

현실 같지 않았어

"브리가둔"의
한 장면처럼

10년만에 깨어났는데 또 그 배역이야
푸른 제복의 경찰들

헬멧 쓴 청년들
같은 현수막에,같은 구호

"공항 반대"

하나만 덧붙이자면
바로 공항이야

그러나 한쪽 활주로와 철조망을 보니
승리가 아니라 포위된 꼴이었어

친구인 야마네코 하야오가
한가지 해법을 내놨어

현재를 바꿀 수 없다면
과거를 바꿔보자

신시사이저로 작업한
60년대 시위 장면을 보여주면서

TV보다는 덜 가식적인 장면이 아니냐고
힘줘 강조했어

적어도 뭘 하는 지는 분명하고
그 이미지들은

이미 놓쳐버린 현실의
간략한 압축 형태는 아니라고

하야오는 이 기계적 세계를 '구역'이라
명명하고 타르코프스키에게 헌정했어

단편화 된 홀로그램처럼
되돌아온 나리타는

60년대 세대의
흠없는 편린이었어

환상 없는 사랑도 사랑이라면
사랑했다고 말하겠어

종종 스스로에게
울컥했지

빈의 봉기와 부의 반란을 통합하는
공통투쟁의 유토피아를 공유하지 못했어

그러나 내부의 아우성은 이젠 정돈되어
더는 아는척 하거나 왈가왈부 않지

투쟁을 거치면서
각성하게 된 농민들과 만났어

따지자면 실패했지

동시에 세상을 아주 잘 알게 됐지
그게 투쟁에서 얻은 성과야

일단의 학생들은 혁명의 순수성이란
명목으로 산 속에서 학살극을 벌였고

투쟁을 위해 자본주의를 철저히
연구하다 최고의 실행가가 된 학생들도 있지

모든 운동에는 사칭자와 출세주의자가 있고
순교를 경력으로 삼기도 해

그러나 체 게바라의 말처럼 대다수가
"불의 앞에서 적개심으로 떨던"이들이야

그 이타심에 정치적 의미를 주려했고
그 생각이 행위보다 오래 갔어

청춘을 낭비한다는 말은
다 허튼 소리야

주말마다 신주쿠에 모이는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현실을 향한 발사대에 선게 아니라

갓 구운 즉석 도너츠 같다는 걸
잘 알아

비밀은 아주 간단해

나이 든 이들은 감추고
젊은이들은 제대로 모르는 것

10살 난 소녀가 친구의 손을 묶고
건물 13층에서 밀어버렸어

자기네 반을 욕해서라는데
확실친 않아

부모들은 아이들의 자살을 막고자
상담전화의 증설을 요구했는데

알고보니 아주 잘
운영되고 있었어

락이 비밀을 전파하는
국제언어지

토쿄에서는
좀 생뚱맞아

다케노코족은
20살이면 은퇴해

아기 화성인들이야

일요일이면 요요기 공원에서
춤판을 벌이지

구경하라는 거지만
사람들 눈을 별로 의식 안해

그곳은 시간이
병렬하는 장소야

보이지 않는 수족관 벽이
구경꾼들을 가로막고 있지

오후 내내 어린 다케노코족 소녀가
춤을 익히는 걸 지켜봤는데

그 행성의 신참내기였어

저마다 명찰을 달고
마피아단처럼 호르라기에 복종해

소녀들만의 한 그룹을 빼곤
지휘는 남자들 몫이야

한 번은 그가
꿈 이야기를 써보냈다

꿈에 자꾸 토쿄 상가의
모습이 나타나

도시 곳곳으로
지하도가 나있지

얼굴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길을 찾다가 잃어버려

장소마다 지나간 이들의 꿈이 서려있고
다음 날 잠이 깨면

전날 밤 숨어버렸던 실체를 찾아
지하 미로 속을 헤메고 다녀

정말 그 꿈들은 내 것이었을까
아니면 도시에 투영된

거대하고 총체적인 꿈의 집합의
일부였을까

혹시 아무 전화나 집어들어도
가슴이 뛰는 친근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세이 쇼나곤 같은

모든 지하도는
역으로 통하고

한 회사가 그 상가의 주인이며
역 이름은 그 상호를 따

게이오나 오다큐처럼

열차에서 조는 사람들의
꿈의 조각들을 한데 모아

한 편의 영화를
이룰 수도 있을 거야

자판기의 차표들이
영화 관람권이고

그는 1월 역 계단의
풍경을 이야기 했다

...이 도시를 한 편의 악보로
해독해야 될 거야

세부에 집착하다 보면
전체 오케스트라의 화음이 헝클어져

그러면 토쿄는 과밀과 과대망상의
무정한 도시로 전락하지

보다 미묘한 순환이 눈에 띄어
한 무리의 행인들에게서 포착되는 리듬감이

일련의 악기들처럼
색다르고 정밀해

이 음악적 비유가
실제 일어나는 경우도 있어

긴자의 소니 계단은
밟으면 소리나는 악기야

각 음들이 어울릴 땐
복잡한 푸가풍으로 들려

하나만 누르고 있어도
음으론 충분하지

TV 화면도 그래

시간대 별 영상들이
뜻밖의 효과를 낼 때가 있지

스모 시즌에 경기를 보려고
긴자의 고급 전시장에 오는 팬들은

토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야

TV를 살 여유도 없는 거야

그는 그들과 나미다바시의 혼령들을
보고 동틀녘까지 사케에 취했다

지금은 몇 시즌 째일까?

그의 편지

컴도사들이 요긴하게 이용하는
전자부품 가판대에서도

토쿄 특유의 곡이 흘러나와
유럽인들은 이게 무슨 음악이냐 할거야

비디오게임 음향 이야기야

테이블에 앉아
먹고 마시며 게임을 해

거리에 널려 있어

듣다 보면
귓가를 맴돌지

일본이 원산인
게임들인데

나중에 여러 나라에서도 마주쳤어
조금씩 변형 됐더군

그래도 척 보곤
눈에 익었어

눈이 빠꼼 보이면 때려잡는
좀 반생태학적인 게임이었는데

그게 북미다람쥐 아니면
새끼 물개였어

이건 원래 일본판이야

동물 대신 사람 머리 같은 게 있고
명패가 붙었어

맨 위가 사장이야

다음 줄이
상무와 차장

맨 앞이 과장과 계장이야

카메라에 잡힌 사내는
사정없이 표적들을 후려갈겼어

언뜻 봐도 우의적 놀이가 아니라
상사들에게 분풀이를 하고 있었어

과장의 머리가 제일 자주 힘껏 맞아
고장이 날 지경이었어

그래서 나중에
물개로 바뀌었을 거야

하야오 야마네코가 자기 기계로
비디오게임을 고안 해냈어

나를 위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동물을
집어넣었어,고양이와 올빼미

그 친구 주장은 전자적 질감으로서만
감정과 기억,상상력을 다룰 수 있다는거야

가령 미조구치의 아르센 루팡이나
보다 더 부락민(천민)을 상정 해봐

일본에는 없다고 분류된 이들을
어떻게 보여주겠어?

실제 있어.오사카에서 날품 팔며
노숙하는 사람들을 봤어

중세 이래 천하고 고된 일을
업으로 타고난 이들이야

그러나 메이지 시대 이후 공식적으로
차별을 금지하고,'에타'란 말은 금기어가 됐어

없는 사람들이니
이미지 아닌 걸로만 볼 수 있잖아?

비디오게임은 인간을 돕는 장치로
첫 출발 했어

미래의 지식을 제공한다는
설계였지

'팩맨'이 담고 있는 철학을
이 시대는 당분간 떼놓을 수 없을거야

아까운 100엔을 투자하면서
세상의 정복감을 느낄 지는 몰랐어

아주 완벽한 그래픽으로
인간의 운명을 은유해서일까

인간과 환경 사이에서
진정한 균형감각을 통찰하고 있어

숱한 승리의 영광을 쟁취하면서도
담담히 일러주지

늘 실패는 있는 거라고

그는 인간이나 동물의 장례식에
똑같이 국화가 등장하는 걸 기꺼워했다

우에노 동물원의 의식 이야기를 했다
그 해 죽은 동물들을 기리는 행사였다

...2년 전 죽은 판다를 애도하는
행렬은 여전했어

보도에 따르면 같은 시기의
총리의 죽음보다 더 애통해 했지

작년에 너무 울어서인지
이번에는 좀 덜해 보여

이제 어린 소녀들은 동화 속의 용이
판다를 데려갔다고 여기나봐

누가 이런 말을 했어

"일본에서 생사의 경계는
서구처럼 그리 동떨어진 게 아니다"

임종 때 사람들의 눈에서
자주 접한 건 경악이었어

지금 일본 아이들의 눈에 서린 건
호기심이야

경계 저 너머를 응시하며
동물들의 죽음을 이해하려는 듯

죽음이 경계 저 너머가 아니라
뒤따를 길인 나라에서 막 돌아왔어

비자고 군도의 대 선조들은
죽음의 여정을 이렇게 묘사했어

엄격한 절차에 따라 섬들을 건너
마지막 해변에 닿고

거기서 배를 기다려
다른 세상으로 간다는 거야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절대 아는 척 해서는 안돼

비자고는
기니 비사우의 일부야

옛 필름 속에서 아밀카르 카브랄이
해안에 작별 인사를 하고 있어

맞았어
다신 못 보게 되지

15년 뒤 루이스 카브랄이 카누 위에서
같은 손짓을 하고 있어

당시 한 국가가 된 기니의
대통령이었지

사람들에겐
전쟁 속의 인물이었고

기니와 케이프 베르데의 피가 섞인
아밀카르의 이복동생으로

혈통만큼 특이한
PAIGC(기니카보베르데독립아프리카당)를 세웠으며

두 식민지의 통합운동 투쟁에 나서
연방국가의 선구자가 되려고 했지

아주 비정한 싸움이었다고
전 게릴라 투사가 그러더군

그 때 겪은 고생에 비하면
포루투갈군은 약과였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 경솔한 태도에
낯이 화끈했어

영화 장면이나 되듯
게릴라 운운 했으니 말이야

당시 숱한 논전과 함께
무수한 피가 땅을 적셨어

아밀카르 카브랄만이
게릴라전에서 승승장구했고

군사적 승리 이상이었어

오랜 연구로
자기 인민들을 잘 알았고

해방 지역들을
사회변혁의 전초로 삼으려고 했어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기와 전사들을 보냈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인민의 병영을 채웠어

극좌파들이 역사를 용서할까
아무튼 게릴라들은 물 만난 생선 같았고

스웨덴인들이 한몫 했어

아밀카르는 함정을 알았기에
완곡한 표현을 썼어

이랬지,"우리는 폭풍과 격랑이 이는
큰 강가에 나와 있다

건너다 빠져 죽더라도 저편에 이르려면
딴 방법이 없다"

이제 1980년 2월 7일의
카사께로 장면이 바뀌어

보충 설명을 위해
시간을 앞지를 필요가 있어

1년 뒤 대통령 루이스 카브랄은
감옥에 가고

지금 훈장을 받으며 흐느끼는
니노 소령이 정권을 잡아

당이 갈리고,기니인들과 케이프 베르데인들은
등을 진 채 아밀카르의 후계 다툼을 벌여

영원한 동지애를 보여주는 듯한
이 승진 축하식의 이면에는

전승 뒤의 허전함이 있고
니노의 눈물은 전사의 감회가 아니라

미흡한 포상에 상처 입은
자존심의 결과라는 게 밝혀지지

저마다의 내면엔
기억이 담겨 있어

집단의 기억이 구축되어 있다고
할만한 곳에서

역사의 큰 상흔과 더불어 개인적 열상을
입은 무수한 기억들이 도열해 있어

비사우의 파도로
포루투갈이 허우적거리는 와중에서

평생 반독재 투쟁을 해온
미구엘 토르가는 이렇게 썼어

"모든 주창자는
자신을 옹호한다

사회변혁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혁명적 행동으로 자기 이미지를 고양한다"

그렇게 파도는 물러갔고

예상대로 역사에 산재된
미래 기억상실증이 일어났어

딱하게도
가상 상황이 맞아 떨어진 거야

아밀카르는 소속 당원에게
피살되고

해방 지역은 잔인한
소폭군들의 수중에 들어갔어

그 자들을 정리해 신임 받던
중앙정부 앞에 쿠데타가 닥쳤어

이게 역사의 진로야
기억에 귀마개를 하지

쿠바로 추방된 루이스와
또다른 음모에 휩쓸린 니노는

사이좋게
역사의 법정에 소환 돼

역사는 개의치 않아
이해도 안해

유일한 벗은
브란도가 말한 공포지

이름과 얼굴이 있는

다른 세상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어
외양의 세계

두 세계는 어느 정도
소통해

한 쪽은 기억
다른 쪽은 역사,그 불가해성

판독 못할 것을 판독하기 위해
설명표가 생기고

기억은 떠도는 섬망의
대용품이야

순간의 정지로 한 프레임의 영상이
타버리고 투영의 연소를 막지

광기가 열 보호판이야

자기 '구역' 속에서 기억의 표식들과
노는 하야오가 부러워

채집된 곤충처럼 핀으로 꽂아놓고
시간으로의 비상을 막아

시간의 밖에서 바라보니
불멸성으로 남지

이 장치를 보면서

기억이 자기 범례가 되는
세상을 생각했어

그는 불가능한 광기의 기억을 묘사한
유일한 영화 이야기를 했다,히치콕의 "현기증"

나선형 표제에서 그가 본 것은
차츰 확대되며 공간을 뒤덮는 시간이

정지된 눈 속에서 사이클론으로
담기는 순간이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영화 촬영지들을 순례했다

제임스 스튜어트가 킴 노박을
염탐하던 포데스타 발도키 화원

사냥꾼과 사냥감

아니 그 반대였나?
그곳은 변함 없었어

그리고 스카티-제임스 스튜어트가
킴 노박-매들린을 뒤쫓던

샌프란시스코 언덕들을
오르내렸다

언뜻 흔적과 수수께끼
살인의 문제 같았지만

실은 권력과 자유
우울증과 위장의 문제였어

교묘히 암호화 된 소용돌이 속에서
그 점을 놓치기 쉽고

이 현기증의 공간이 실은 시간의
현기증이라는 걸 금새 못 알아차려

그는 자취를 따라
미션 돌로레스의 묘지에도 갔다

매들린이 오래 전 죽은
낯선 여자의 묘에 참배하던 곳이다

스코티가 매들린을 쫓았던
리전 아너 박물관에도 들렀다

매들린이 낯선 여자의
초상화 앞에 섰던 곳이다

초상화와 매들린의 머리결은
나선형의 시간이야

매들린이 사라졌던 작은 빅토리아식
호텔은 이젠 없어졌고

이디 고흐가 모퉁이엔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섰어

반면 뮤어 숲의 잘린
세쿼이어 나무는 여전했어

매들린이 수령이 오래된 나무의
나이테를 더듬으며 말하지

"난 이쯤에서 태어났고
이쯤에서 죽었어요"

그는 이 대사가 인용된
다른 영화를 기억해냈다

세퀘이어 나무는
파리 식물원에 있었고

손은 나무 밖의 장소
시간대의 밖을 가리켜

그는 산 후안 보티스타의 말 그림을
매들린의 눈으로 봤다

히치콕이 지어낸 건 없으며
다 있던 것들이야

그는 매들린이 죽음을 향해 뛰던
선교원의 아치형 산책로 아래를 달렸다

아니 그 위였던가?

히치콕이 유일하게 첨가한
모형탑을 보면서

그는 스코티의 시간에 농락당한 사랑과
조작된 기억의 삶을 그려보았다

자신만의 시간대인 다른 차원에서
매들린의 분신을 만들어냈고

금문교에서 비롯된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려했어

샌프란시스코 만에서
매들린을 붙들어

목숨을 구해주고
다시 죽음으로 되돌려보냈지

아니 그 반대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19번 봤던
영화를 순례했고

아이슬랜드에서 머리 속 영화의
초석을 놨어

길에서 세 아이를 만난 그 해 여름
바다에서 화산이 분출했어

이 분화구에
다른 일화가 있지

미국 우주비행사들이 달과 닮은
이 변방에서 훈련했어

금새 SF 소설이 떠올랐어
다른 행성의 풍경

그보다는 아주 먼 데서 온 누군가가
마주한 지구의 풍경이랄까

발에 달라붙는 화산재 위를
터벅터벅 걷는 모습

갑자기 발을 헛딛고
그 다음이 1년 뒤야

이젠 네덜란드 국경 근처
바다새 보호구역의 소로를 걷고 있어

그렇게 시작돼

왜 시간의 단절이 기억과 연결될까?
단순한데 스스로는 몰라

다른 행성에서 온 게 아니라
미래에서 온 거야

4,001년에서

인간의 뇌가 최고의 경지에
이른 시대지

만사가 완벽하고
기억도 수면을 통해 보존 돼

논리적으로는 마취된 기억들을
소환하는 거야

기억을 상실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은데

망각을 잃어버린
특이한 사람의 이야기야

주인공은 과거 인류사의 그늘에
우쭐해지기보다는

먼저 호기심으로 대하면서
비교해봐

그가 속한 세상에서는
영상을 불러오거나,그림에 감동하거나

음악에 심취하거나 하는 일 따위는
길고 고통스러웠던 전 시대의 습속일 뿐이야

그는 이해하고 싶어해

병약한 시대의
부당함을 느끼고

체 게바라나 60년대의 젊은이들처럼
그 부당함에 분개해

그는 시간의
제3세계인이야

과거 이 행성에 불행이
존재 했다는 사실에 견딜 수가 없어

또한 빈곤도 마찬가지고

그가 실패할 건
자명해

불행을 체감할 수 없지
부자나라 아이가 빈국의 아이를 모르듯

스스로 특권을 포기했더라도
그 선택의 특권은 어쩌지 못하지

이 부조리한 탐구에서 위안이 있다면
무소르그스키의 연가곡이야

40세기에서도 불려지지

그 뜻은 잊혀졌지만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이해 못하는
불행과 기억의 존재를 감지하고

그곳으로 뚜벅뚜벅
걸어나간 거야

물론 그 영화를
만들진 못할 거야

그래도 배경 설정이나 장면 전환
내가 좋아하는 동물들의 등장을 그려봐

제목도 정해놨어
바로 무소르그스키에서 딴 "태양 없이"

1945년 5월 15일
오전 7시

미국의 382보병연대가 오키나와의
한 고지를 공격해,'딕 힐'고지

미국은 일본 땅을
정복하는 것만 생각했지

류큐 문화는
전혀 몰랐을 거야

나도 그렇지만 이토만의 시장 여자들이
우타마로 말고 고갱 이야기를 하더군

수백년의 봉건 시대 동안
열도의 시간은 고여 있었어

그리고 일이 닥쳤지

여성을 기억의 후견인으로
삼는 게 섬의 속성일까?

비자고에서도 여자들이
신비지식의 전수를 담당했어

마을마다 노로라는 무녀가 있어
장례식을 뺀 모든 의식을 주관해

일본군의 방어선이
조금씩 밀렸고

해질 무렵 L중대의 잔여 2소대 반 남짓의
병력이 겨우 고지 중턱에 이르렀어

정화제 올리는 주민들을 따라
그 언덕길을 올라가봤어

노로는 해신과 지신,비의 신
불의 신과 소통해

다들 누이 신에게
절을 해

오누이와 연관된
절대신앙의 반영이야

사후에도 누이는
그 영적 지배력을 유지해

새벽에
미군은 후퇴했어

한 달 넘는 전투 끝에 섬은 항복했고
현대사회가 도래하지

그 뒤 27년 동안 미국의 점령지였다가
논란 끝에 일본에 반환되지

지척에 볼링장과 주유소가 있는 곳에서
노로는 신들과 계속 소통해

언젠가 그 대화가
끊길 것이고

죽은 누이의 보살핌도
더는 존재하지 않을 거야

이 의식을 찍으면서
어떤 종말의 장소에 있는 기분이었어

무속 문화는
사라진 흔적들을 계승하지

그런데 남은 게 없어
아주 무자비한 역사의 단절이야

고지 정상에서 그 단절을 살피고
도랑 가에서 더듬어 봤어

1945년 200명의 여학생들이 미군에게
생포되지 않으려고 수류탄 자살한 곳이야

도랑 앞에서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어

맞은 편에서는 수류탄 모형의
기념 라이터를 팔고

하야오의 장치 속에서 전쟁은
타버리는 문자나 튀는 불똥 같아

진주만의 암호명은 토라,토라,토라였어
고코쿠지의 부부가 제를 올리던 고양이 이름

그 이름 세 번으로
모든 게 시작 된거야

오키나와 해전에서 카미카제들이
미국 함대에 돌진해 전설이 되었지

만주의 특수부대 보다는 나았겠지
포로들을 동상에 걸리게 했다가

열탕에 넣고 뼈와 살의
분리 속도를 측정 했잖아

카미카제들의 유서들을 읽어보면
다 지원했거나

허세부리는
사무라이들만은 아니었어

마지막 사케 한 잔을 들면서
우헤하라 료지가 쓴 편지야

"나는 늘 일본이 영속하기 위해서는
자유주의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보 같은 소리로 들릴 지 모르지만
지금의 일본은 전체주의다

우리 카미카제들은 기계다
부디 일본이 위대한 나라가 되었으면 한다

비행기 속의 나는 기계며
항공모함에 달라붙는 금속자석이다

그러나 지상에서는
감정과 열정이 있는 인간이다

좀 횡설수설 하는 것 같다

웬지 울적한 인상을 남기는 것 같지만
마음 속으로 나는 흡족하다

솔직히 말하겠다
나를 용서하라"

아프리카에서 돌아올 때면 그는
대서양 복판의 암염섬 살에 들리곤 한다

섬 끝 산타마리아 마을 너머
화사한 묘지가 있고

그대로 한참 걷다 보면
사막지대가 나온다

그의 편지
...환각을 알 것 같아

갑자기 밤에 사막에 들어선다고 해봐
그곳은 존재감이 없는 곳이 돼

불쑥 나타난 풍경에
아연실색하지

일 드 프랑스에
에뮤가 있다는 이야기를 했던가?

프랑스의 섬이라는 그 이름이
살 섬에선 묘한 울림이야

기억 속에
두 탑이 겹쳐져

잔다크가 야영했던
몽필로이의 고성 탑과

살 남쪽의 등대탑인데
이젠 유일한 경유 등대일 걸

사헬의 등대에서는 콜라주처럼
바다 끝의 모래사장과 염전이 보여

대륙횡단 비행기 승무원들이
살에서 교대하지

승무원들의 해안 리조트의 클럽들이
이곳 풍경들과 못 어우러지고 비켜나 있어

승무원들은 해변의
들개들에게 먹이를 줘

그 개들이 오늘 밤 아주 신이 났어
전에 못보던 모습을 해변을 누비고 다녀

홍콩 라디오를 듣고서야 알았어
오늘이 음력 정월 초하루였고

60년만에 개와 물의 간지가
만나는 해였어

거기서 17,600킬로 떨어진 곳에서는
누군가 꼼짝않고 서있었어

1월의 토쿄 풍경 속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선

주인공은
아사쿠사의 승려였어

일본도 개의 해의 시작이야

절을 메운 방문객들이
동전을 던지며 일본 식 기원을 해

한 해 동안 아무 탈 없으라고
비는 거야

세상 끝의 섬 살에서
껑충대는 개들과 있으면서

1월의 토쿄를 기억했어
아니 내가 찍은 이미지들의 기억이지

그게 내 기억의
대용품들이지

그게 바로 기억이고

필름이나 사진,테이프 없이
어떻게 기억하겠어?

인류가 어떻게
기억을 유지하겠어?

그래
그건 성서의 기술이야

영구자기테이프에 담긴 새 성경으로
전 시대를 언제라도 되돌아볼 수 있을 거야

40세기에는 모든 기억을
불러올 수 있을 거야

새해에 육각함에서 뽑은
점괘보다 더 신통하게

잔다크의 야영지의 전령보다
더 신속하게

케이프 베르데에서 청취된 홍콩의
단파 방송이 토쿄에 투사돼

활기찬 거리의 색감 그대로
다른 배경과 장소,음악에 실려 끝없이

기억의 끝은 길이야

새해의 눈부신 빛 속에서
토쿄의 간지가

프랑스의 섬의 표지판만큼
낯설지 않아

인디안 윈터처럼
수없는 정화의식이 이어지면서

일본인들은 묵은 때를 지우고
새해를 맞아

한달 내내 정성껏
이 시기에 공을 들이지

그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건
텐진사에서 우소 새를 사는 거야

지난 해의 거짓말을 다 먹어치워
깨끗해진다는 유래가 있지

그러나 1월의 거리를 확 달라보이게
하는 건 기모노의 행렬이야

거리와 가게,사무실,개장일의
주식거래소에도 털깃의 겨울 기모노가 등장해

그 때 다른 일본인들은
특수 평면 TV를 발명하고

전기톱 자살을 하거나
세계 반도체 시장의 2/3를 점유하지만

그래도 볼거리는
여자들이야

1월 15일이 성인의 날이었어
젊은 여성들에게 성년식을 치뤄주지

시에서 선물과 메모책
훈례집이 든 작은 가방을 나눠줘

올바른 시민과
현모양처가 되라고 적혀 있지

이날 만 20세 되는 여성들은
전국 어디나 무료통화를 할 수 있어

국가와 가정,사회가
성인의 관문이야

타케노코 족과 락 가수의 시절은
쏜살같이 지나가

스피커에서
사회의 바람이 흘러나와

이 지침을
언제까지 기억할까?

행사가 다 끝나면
장식용품과 행사도구들을

다 모아서
태우는 의식이 있어

이 돈도야키는 우에노의 인형처럼
영험있는 잔해를 축복하는 신도의 의식이야

사라지기 전의 마지막 모습은
사물의 슬픔을 자아내지

모닥불 맨 꼭대기에
외눈박이 달마상의 영이 군림해

버리는 잔치고
파기하는 잔치야

잃고,부숴지고,낡은 것들에 대한
작별이 축제로 승화되는 거야

이혼식도 치뤄져야한다는
프랑스의 작가가 반길만한 나라야

한가지 이해 못할 순서는
아이들이 빙빙 돌며 장대로 땅을 치는 거야

웬지 친숙감이 들며
한가지 해답이 떠올랐어

두더쥐를 쫓나보다

여기서 그 아이슬란드의 세 아이의
모습이 끼어들었어

흐릿한 끝 장면을 추가해
전체를 재구성했어

절벽 아래서 몰아치는 강풍으로
화면이 흔들려

찍을 땐 좋게 봤던 여백들을
과감히 잘라냈어

근경에서 원경
초당 24 프레임으로

헤이매이 시가
아래 펼쳐져 있어

5년 뒤 친구인 하룬 타지에프가
같은 장소의 필름을 보내왔어

한가지 빠졌던 건
자연이 연출한 돈도야키였어

아이슬란드의
화산이 깨어났어

이 장면을 보면서 내가 보냈던
1965년 한 해가 재로 덮히는 기분이었어

기다려야겠지
행성이 자기 일을 하는데

내가 묵던
방 창문이 보였어

눈에 익은 지붕과
발코니의 모습

매일 산책 다니던 길가의 건물
세 아이와 마주쳤던 절벽길

양말 신은 고양이를 하룬이 한참
따라다녀서 금새 그곳을 알아봤어

문득 가장 절절한 한마디가 떠올랐어
고토쿠지에서 부인의 정성어린 기원

토라에게 그랬지
"고양아,어디 있든 편안해라"

이젠 하야오의 '구역'으로 들어갈 차례야
내 영상들엔 이미 시간의 이끼가 돋았어

당시의 존재감에서 벗어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어

봄이 오면 까마귀들은
목청 높여 계절을 알리지

녹색의 야마노테선 열차를 타고
중앙우체국 근처 토쿄역에 내렸어

차량이 없었지만
일본식으로 빨간 불을 기다렸어

사고 차량의 영이
지나갈 수 있도록

올 편지가 없었지만
우편창구 앞에 멈춰서서

찢겨진 편지와 부쳐지지 않은 편지의
영들에게 경의를 표했어

서구식의 오만한 허영심을
단속한 거야

비존재에게도 특권이 있어
말하지 않고 말을 해

소규모 옷 가판대를
따라 걸었어

멀리서 아카오씨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타고 쩌렁쩌렁 울려퍼졌어

이윽고 전자낙서광인
친구의 지하실로 내려갔어

이제야 그의 언어가 와닿았어
그건 감옥벽에 쓰는 자기 프로필 같은 거였어

분필 조각 끝에서 없는 것,또는
더는 없는 것,아직 없는 것이 나타나

이 작업으로 '가슴을 뛰게하는 것들'을
스스로 적거나 지울 수 있을 거야

그 순간엔 누구나 시인이고
'구역' 속에 에뮤가 있을 거야

그는 일본에서
또 아프리카에서 편지를 쓴다

이젠 프라이아 시장 여자의 표정을
한 프레임에 담을 수 있다고 했다

언제쯤 다음 편지가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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